1. 그래서
오해에서 시작된 그림이 있다. 무언가를 깨닫고 충만해졌을 때 에야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있다면, 장승근의 그림은 의문과 결핍으로부터 비롯된다. 내가 모르는 것, 얼핏 안다고 생각했음에도 영영 모르게 되는 것, 그러니까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이해(理解)와 오해(誤解) 사이에서 장승근의 그림은 시작된다. 굳이 두 단어를 한자로 병기한 이유는 그가 종이나 캔버스 위에서 행하는 제스처가 그르치거나(誤) 다스리는(理) 일에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르침과 동시에 다스리는 일이라 할 수 있는데, 둘 사이를 역접해서 말하지 않는 이유는 장승근의 그림이 둘 중 하나를 택하기 보다 그 사이를 계속해서 오고 가는 길을 택해서 이다. 따라서 적어도 이 글에서는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성질의 단어 또한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표현할 것이다. ‘그래서, 그리고, 그러므로’ 따위로 접속되는 단어와 문장은 아무리 멀더라도 끝끝내 서로를 잇는다.
장승근의 회화적 형식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기에 앞서 긴 서두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까닭은, 그의 그림이 근저에 머금고 있는 개인적인 서사를 언급하고 싶어서 이다. 그가 이렇게 반대되는 것, 모순되지만 결국엔 연결되고 마는 것들에 집요한 관심을 두는 배경에는 지극히 사적인 가정사가 있다. 함께 하기엔 너무 다른 부모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반복적인 갈등 상황, 그럼에도 이를 극복하고자 이어온 노력은 불행을 불행으로 남기지 않았다. 장승근은 이 과정으로부터 각자의 결핍이나 명료하게 정돈하기 어려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태도를 길어 올렸다. 그에게 있어서 개인과 개별 사물, 상황과 풍경의 빈틈은 균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닌 연결을 지속하도록 이끄는 매개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오해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2. 그리고
장승근의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그가 마주하는 대상은 주로 즉흥적인 드로잉이나 사진을 통해 채집된다. 채집된 이미지는 캔버스라는 또다른 지지체로 옮겨가며 새롭게 더해지고 탈각 되는 부산물을 만들어 내는데, 그는 이 부산물들을 모두 그러모은 듯 압축된 획으로 빠르게 대상을 묘사한다. 그리고 완성에 이를 때까지 스케치의 기능을 했던 획과 선묘를 그대로 남겨 두거나 재강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대상을 바라보던 시선의 움직임, 대상과 내가 마주하고 있던 순간의 인상을 물감이 가진 물성으로 옮겨 내기 위해 선별한 의도적인 행위다. 장승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생동감, 이를테면 금방 화병에 꽂아 둔 것 같은 꽃과 막 내려놓은 듯한 붓, 좀 전에 마주한 듯한 눈빛은 바로 이 선의 궤적에서 연원 한다. 그의 그림이 담아내는 무상한 대상의 순간은 언제나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한편 그리는 주체 로서의 장승근과 그려지는 대상으로서의 인물, 사물, 풍경은 그림을 매개로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실제 대상과 그리는 이가 맺는 느슨하고 팽팽한 관계는 회화적 제스처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있다. 붓이 향하는 캔버스를 보지 않은 채, 대상의 외형부터 내밀한 곳까지 꿰뚫어보고자 움직이는 시선은 이내 그르친 선과 면을 긋고 만다. 그리고 우연히, 어쩌면 당연하다는 듯 대상의 표면을 따라 정확하게 그어진 윤곽선은 그가 바라보는 것들을 천천히 다스린다. 대상으로부터 아주 먼 것과 가까운 것을 한데 모으는 식으로 캔버스의 화면을 누비는 그의 제스처-붓질은 이러한 긴장과 이완 속에서 이루어진다.
장승근이 그림에 담아내는 대상 중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는 사물은 붓과 물감, 캔버스 따위의 재료이다. 이들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데 수반되는 도구를 넘어서, 작가와 외부 세계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손에 쥔 붓은 시선이 향하는 대상을 또 다른 영역으로, 즉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거나 사라지는 영역 속으로 이끈다. 이때 캔버스의 표면은 그와 세계가 재료를 통해 “맞닿는 장”[1]이 된다. 외부를 향한 시선, 대상과 주고받은 무언의 대화는 선과 면을 통해 비로소 어떤 ‘형태’를 얻는다. 장승근은 갖가지 형태를 만들어내곤 하는 작업실 풍경을 그린 뒤 < 그림 그리는 사람 >(2024)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기’를 위해 수반되는 도구와 완성된 ‘그림’은 시선과 행위의 연장으로서 ‘그림 그리는 사람’의 눈빛과 손이 가 닿는 면적을 확장 시킨다. 마치 그 자리에 자신이 남겨 둔 무언가가 살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장승근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이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와 그려지는 대상, 그림 그리는 사람은 거울처럼 닮은 얼굴을 한 채 서로를 바라본다.
3. 그러므로
최근 그는 자신의 주변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그려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머리 깎아주는 엄마와 거울에 비친 나, 화면 바깥에서 그 장면을 찍는 아빠의 시선, 동료 작가들의 얼굴 같은 것. 모르는 것을 그릴 때에 장승근의 그림은 보다 솔직 해진다. ‘모른다’는 사실을 고백하듯, 그의 그림은 익숙함에서 발견한 생경함으로부터 점차 더 낯선 것으로 향해간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르침과 다스림 사이를 왕복하는 장승근의 그림이 도달하는 곳은 어디일까? 아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앞을 가로막는 것들 때문에 더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을 때일 것이다. 그림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어떤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면, 장승근은 그것이 몇 안되지만 완벽한 순간보다 도처에 널려 있는 결핍을 직시하는 순간에 가까운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폭은 너무 좁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은 너무 많다. “우리 의식과 감정 사이의 이런 간극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이, 얘기된 것과 얘기되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이” 여기 있다. 장승근은 “우리가 만났으면 하는 곳이 그런 곳”이라 말한다.[2] 그곳에서 우리는 매번 서로를 모른 채 지나칠 것이다.
[1] 2024년 3월 15일 작가와 나눈 대화에서 쓴 표현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2] 존 버거, 이브 버거, 『어떤 그림』, 신혜경 역, 열화당, 2021, p.33. 이브 버거가 존 버거에게 쓴 편지 中.